
통영의 서쪽 언덕 위에 자리한 서피랑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골목의 도시다. 계단과 담장, 그리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오래된 골목에는 통영 사람들의 삶과 예술이 함께 녹아 있다. 한때는 낡고 조용한 주택가였지만, 지금은 ‘통영의 감성 언덕’으로 불리며 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서피랑은 이름 그대로 ‘서쪽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을을 오르는 동안 벽화와 조형물, 그리고 주민들이 손수 가꾼 정원이 이어진다. 동피랑이 화려한 색채와 관광의 활기로 가득하다면, 서피랑은 고요함 속의 따뜻함이 매력이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조금 차오르지만, 그만큼 마음은 가벼워진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통영항의 풍경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듯 아름답고, 그 아래로 펼쳐진 지붕들은 이 도시의 긴 세월을 이야기한다. 이번 글에서는 서피랑의 대표 명소, 골목길의 예술, 그리고 여유로운 카페 여행까지 하루를 완성하는 서피랑 감성 코스를 소개한다.
99계단과 벽화길, 서피랑의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거리
서피랑의 중심은 ‘99계단’이다. 길게 이어진 돌계단은 통영의 오랜 시간을 상징하며, 계단마다 시민들이 직접 꾸민 예술 작품이 자리한다. 계단의 시작점에는 ‘서피랑 벽화마을’이 있다. 벽면에는 바다를 닮은 푸른 색감과 통영의 일상을 그린 벽화들이 이어진다. 물고기, 파도, 항구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이 그림 속에 녹아 있다. 하나하나의 벽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통영이 예술의 도시로 살아온 이유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소망의 계단’이 나온다. 각 계단에는 누군가의 소원이 적혀 있으며, 그 글자들이 마치 시처럼 느껴진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통영항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대에서는 미륵산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지고,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들이 점처럼 보인다. 그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고요함 속에서도 생동감이 있고, 정적인 가운데 따뜻함이 느껴진다. 전망대 근처에는 ‘서피랑 예술쉼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작은 공연이나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서피랑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자 이야기의 골목이다. 걷는 내내, 통영이라는 도시가 왜 ‘예술의 항구’라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감성 카페와 골목 풍경, 여유가 머무는 언덕의 하루
서피랑 여행의 마지막은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들이 이어진다. ‘서피랑 언덕카페’는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로, 2층 창가 자리에 앉으면 통영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라보는 바다는, 어느 미술 작품보다도 깊은 울림을 준다. ‘카페 통영서쪽’은 흰색 벽과 나무 인테리어가 어우러진 감성 공간으로, 이곳에서는 직접 구운 디저트와 수제 청귤차가 인기다. 카페 근처에는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작은 공방이 여럿 있다. 나무 조각, 도자기, 천연비누 등 여행의 추억을 담은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골목 사이에는 여전히 주민들의 일상이 살아 있다.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고, 담장 너머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서피랑의 매력은 이런 ‘삶과 예술의 공존’에 있다.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나무문, 낡은 간판,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까지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서피랑 언덕에서 바다 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을빛이 골목의 벽화와 유리창에 반사되어, 마을 전체가 따뜻한 빛으로 물든다. 그 순간 서피랑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이 머무는 마을’이 된다.
조용한 감성 속에서 만난 통영의 얼굴
서피랑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도시의 품격이 있다. 벽화와 계단, 바람과 노을 —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통영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 계단씩 오르고, 한 장면씩 바라보며 자신만의 속도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도시의 소음 대신 바람과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래된 담장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서피랑의 아름다움은 완벽함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불완전하고 낡은 모습 속에서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진다. 바다를 향해 열린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통영의 풍경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라 ‘이야기’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과거와 현재, 사람과 예술,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공존한다. 서피랑을 걷는 일은 통영의 시간을 걷는 일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여행자는 조용하지만 깊은 감동을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