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중심을 따라 흐르는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시 구조를 온전히 품은 유산입니다. 그중에서도 **백악구간**은 자연과 역사가 가장 밀접하게 어우러진 구간으로, 도심 속에서 과거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백악구간은 북악산(백악산)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길로, 서쪽의 창의문에서 시작해 청운대, 말바위전망대를 지나 혜화문에 이르는 약 4.7km의 구간입니다. 도심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서울의 전경과 함께 600년 역사를 품은 돌담길이 이어집니다. 조선의 도성이 처음 축조된 1396년 이래, 한양도성은 단순한 방어시설을 넘어 백성의 삶과 도시의 경계를 상징했습니다. 백악구간을 걸으며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왕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시간의 층을 걷는 역사 탐방로**입니다. 성벽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 바람에 스치는 돌담의 질감, 그리고 저 멀리 번지는 도시의 소음까지 — 모두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한양의 언어처럼 다가옵니다. 이번 글에서는 창의문에서 시작해 백악마루를 지나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백악구간의 역사적 의미와 자연의 조화를 함께 살펴봅니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 성곽이 들려주는 이야기
**창의문**은 백악구간의 출발점이자, 한양도성의 서북문입니다. 조선 태조 때 축조된 이 문은 ‘자주문’이라 불리며, 왕이 북악산으로 행차할 때 사용되던 통로였습니다. 지금은 시민에게 개방된 성곽길의 시작점으로, 이곳에서 백악산을 향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입구를 지나면 완만한 오르막길과 함께 돌담이 이어집니다. 돌의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보수된 흔적입니다. 초기 조선시대의 성돌과 근대기에 복원된 석축이 한 구간 안에 공존하며, 그 사이에서 시간의 층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곽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오르면 **청운대 쉼터**가 나옵니다. 여기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북악산의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맑은 날에는 남산타워와 한강이 동시에 보이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성곽의 이음새 사이로 소리가 맴돌아 옛 전령의 메아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청운대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말바위전망대**에 닿습니다. 조선 시대 군사들이 이곳에서 신호를 전달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바뀌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도심의 건물 사이로 성곽이 유연하게 이어지며, 서울의 옛 경계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구간은 자연이 성곽을 품고 있어 사계절의 색이 뚜렷합니다. 봄에는 진달래가 성벽을 덮고, 여름에는 녹음이 그늘을 만들며,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돌담을 감싸고, 겨울에는 눈발이 돌 위에 내려앉습니다. 성곽을 걷다 보면 곳곳에 ‘한양도성 복원 기록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75년 이후 지속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전통 쌓기 기법과 석재 보존 방식을 시민이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왕이 머물던 성벽’이자, 지금은 시민의 일상이 된 산책로입니다. 돌담 위의 바람은 여전히 조선의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길, 도심 속의 시간 여행
백악마루를 지나면 성곽길은 점차 완만해지고, 숲 사이로 도심의 풍경이 가까워집니다. 이 구간은 **백악산 북사면을 따라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역사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성곽의 구조가 조금씩 변합니다. 초창기에는 크고 거친 돌로 쌓았으나, 후기 복원 구간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석재가 사용되어 균형 잡힌 형태를 이룹니다. 성벽 위에는 군사 초소를 복원한 망루가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당시 병사들의 생활을 설명하는 전시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혜화문**입니다. 1396년 한양도성이 완공될 때 함께 세워진 북동문으로, 서울 도심과 성북동을 연결하던 관문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도로 확장으로 사라졌지만, 1992년에 복원되면서 한양도성의 완전한 형태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혜화문 앞에는 성곽길 완주 인증센터가 있으며, 주말이면 순성(한양도성 전체를 도는) 여행자들이 도장을 찍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성문 주변에는 **와룡공원과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연결길이 있어, 백악구간의 끝에서 다시 동쪽 성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해 질 무렵 혜화문 성문 뒤로 붉게 번지는 노을은 도심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성곽 아래쪽의 한옥 거리에는 ‘**혜화문 전망다방**’과 ‘**서울성곽갤러리**’ 같은 문화공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성곽 복원 사진전과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이 운영되어, 역사와 일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백악구간은 서울의 번화함과 고요함이 교차하는 길입니다. 성곽길 위에서는 역사의 무게를,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생활 소리를 듣게 됩니다. 혜화문에 닿는 순간, 여행자는 깨닫게 됩니다. 이 길은 과거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현재의 길**이라는 것을.
서울의 중심에서 시간을 걷다
한양도성 백악구간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과거와 현재를 함께 걷는 공간’ 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길입니다. 성곽 위로는 조선의 돌과 흙이, 그 아래로는 현대의 아스팔트가 이어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길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은, 서울이 지닌 역사적 깊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이 길의 매력은 특별한 장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시간의 질감**에 있습니다. 복원된 성벽, 닳은 돌계단, 비바람에 그을린 안내판 — 그 모든 것이 시간이 쌓아 만든 풍경입니다. 서울 시민들에게 한양도성 백악구간은 단순한 등산로나 유적지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뛰는 러너의 코스이자, 주말 가족들의 피크닉 공간이며,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의 역사를 체험하는 문화 무대입니다. 도심 속에서 이렇게 깊은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서울이 가진 드문 선물입니다. 하루의 끝에서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돌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속삭입니다. “이 길은 수백 년 전에도 누군가의 하루였다.” 그 바람을 들으며 내려오면, 현대의 불빛과 과거의 그림자가 한 장면 안에 겹쳐집니다. **한양도성 백악구간**은 그렇게 오늘의 서울 안에서, 여전히 조선의 시간을 걷고 있습니다.